2013년 7월 17일 수요일

제헌절 특집 헌법 이야기

오늘은 7월 17일, 제헌절입니다. 헌법이 공포(公布)된 날이지요. 우리 시국선언문도 작성하면서, '헌법'에서 기준하고 있는 민주주의적 원칙을 기초로해서 작성하였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이 정도는 동의하는 대 원칙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제헌절을 맞이해서, 간단한 대한민국 헌법의 역사를 한번 볼까요? 이 글을 보시는 법학과 출신이시거나 현제 법조계에 몸 담고 계시는 전문가 동문님들께 송구스럽지만, 의미를 되새기는 차원에서 조금만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

제헌헌법은 1948년 7월 17일에 공포되었습니다. 이 날을 기려 제헌절이 된 것이고요. 1948년 5월 10일 구성된 제헌국회에서 완성되었습니다.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고, 단원제 국회, 대통령제라는 내용이 주요 골자입니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대통령은 국민이 선출하는 것이 아니라 국회에서 간선으로 선출하는 것이었고, 정, 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이시영이 당선되어 제1공화국이 출범하게 됩니다.

1952년 제1차 개헌, 1954년 제2차 개헌이 있었지만, 전쟁중과 전쟁후의 시급한 상황에서도 이승만의 장기집권을 위한 내용 이외에는 큰 특징이 없습니다. 더우기 1차 개헌은 발췌개헌, 2차 개헌은 사사오입개헌으로 유명하죠?

1956년 제3대 정, 부통령 선거가 실시되고 이승만, 장면이 당선됩니다. 당시 이승만은 온갖 부정행위를 저질렀는데도 겨우 52%선의 득표에 그쳤다고 합니다. 이승만은 위기를 느껴 당시 진보당의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던 조봉암을 간첩혐의로 몰아 1958년 사형을 언도합니다. 그리고 1960년 3월 15일에 실시된 제4대 정, 부통령 선거에서 엄청난 부정선거로 이승만, 이기붕이 당선됩니다. 다시 이기붕의 조작된 득표율이 95~99%가 나오자, 득표율을 낮추라고 지시해서 이승만 88% 이기붕 79%로 다시 바꾸었다고도 하네요.

이 사실에 대해서 전 국민적으로 불신의 여론이 확산되었고,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위가 일어납니다. 이 과정에서 사망한 마산의 고등학생 김주열군이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로 마산앞바다에 시신이 되어 떠올랐고, 결국 우리 국민들은 전국민적인 시위에 돌입하게 됩니다. 잘 알려진 4월 19일에는 전국적으로 18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하네요.

결국 1960년 6월 15일, 제3차 개헌을 통해 내각책임제를 채택하는 등 광범위한 헌법의 개정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헌법에 기초하여 대통령 윤보선, 국무총리 장면의 제 2공화국이 출범하였습니다. 이때 국민의 기본권 강화, 국가기관의 중립과 민주화, 지방자치단체장의 직접선거 등의 많은 시도를 하였습니다. 같은해 11월에 315부정선거를 처벌하기 위한 헌법의 부칙을 개정하기도 했습니다.

가끔 이 때의 시도들이 성공했다면 우리나라는 과연 어떤 모습이 되었을까 상상해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모두 부질없는 상상일 뿐인 것이, 결국 이 정권은 9개월밖에 집권하지 못합니다. 당시 여당이던 민주당이 정치적으로도 당 내부의 혼란을 정리하지 못했고, 경제정책도 결론적으로 실패했다고 밖에 할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런 불만과 더불어, 4월혁명이 요구한 개혁조치마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 연일 시위가 계속되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통일운동, 노동운동 등의 새로운 시도가 생겨나기도 했고요.

하지만 1961년 5월 16일, 박정희를 비롯한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서울을 장악하고, 청와대로 입성합니다. 군정체제는 입법, 사법, 행정의 모든 분야를 장악하고 남한 전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지요. 이듬해 12월, 제5차 개헌을 통해 제3공화국이 탄생합니다. 이때 헌법을 전문개정하여, 실질적으로는 헌법을 새로 제정한 셈이 됩니다. 1969년, 3선개헌으로도 알려진 제6차 개헌을 통해 박정희는 장기집권의 발판을 마련합니다.

1972년에 또 한번 헌법을 전문개정하는 제7차 개헌이 일어나고, 제4공화국이 탄생합니다. 이 1972년 10월 17일의 헌법을 유신헌법, 그리고 이 사건을 10월유신이라고 하지요. 군부대를 동원하여 전국을 비상체제로 만들었고, 박정희의 1인독재체제가 시작됩니다. 이 개헌을 통해 박정희는 긴급조치라는 방법으로 대한민국을 지배합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는 김재규에 의해 암설당합니다. 김재규에 대한 평가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여기서 그 이야기까지 하기엔 너무 길어지고요, 하여간 이로써 18년간의 박정희 독재가 무너집니다. 김재규 한명으로만 무너진 것은 아닙니다. 긴급조치라는 공포에 떨면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너무 많은 사람들이 민주화를 위해 희생하였습니다.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 것도 1970년, 박정희정권 하였고 신영복 선생이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20년간 옥살이를 한 것도 이때입니다. 1979년 10월의 부마항쟁은 10.26사태의 결정적인 요인으로 꼽히기도 합니다. 하지만 군부독재가 끝나기엔 아직 좀더 시간이 필요합니다. 당시 보안사령관이던 전두환이 국무총리이더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을 앞세워 비상계엄을 선포하였습니다. 이후 군부에서는 '정치군인'을 제거하자는 주장이 대두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전두환은 12.12사태라는 쿠데타를 일으켜 군부를 장악합니다.

1979년에서 1980년이 넘어가는 시기를 '서울의 봄'이라고도 합니다. 군부의 독재에서 민주화로의 이행을 바라는 움직임들이 대학생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일어났습니다. 특히 당시에는 대학생들이 단체로 교련과목 같은것을 수강해야 했고, 교련복을 입고 군대에 입소해서 병영집체훈련이라는 것을 받곤 했는데요, 이에대한 폐지운동이 중심적으로 일어났습니다. 80년 4월들어 신군부세력(전두환)의 정권장악 음모가 노골화되자, 5월, 전 사회적인 민주화투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슬픈 5월에, 바로 광주민주화운동이 있었습니다. 5월 17일 전국적인 시위에 대해서 비상계엄확대조치가 취해졌고, 이로 전국 각지의 민주화운동 세력들이 잠잠해졌지만, 5월 18일 광주의 전남대 학생들은 교문앞에서 군인들과 충돌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학생들이 사망하고, 이에 대해 광주시민들이 군인, 경찰과 맞서 약 10일간 광주 전역에서 전개한 한국 현대사 최대의 민주항쟁이 일어났습니다. 결국 5월 27일, 계엄군이 전남도청을 점령하면서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끝나게 됩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대한민국과 세계의 민주세력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여기에서부터 87년까지의 민주화투쟁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광주민주화운동의 배후자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지목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자 다시, 헌법이야기로 돌아가 보죠. 신군부는 중앙정보부(중정)의 뒤를 이어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를 만들고, 삼청교육대를 만들어 많은 사람들을 잡아들이고, 언론사들을 통폐합합니다. 이 시기는 보수, 수구인사로 잘 알려진 조선일보의 전 편집장 조갑제씨도 정권에 의해 해직당하기도 했던 시절입니다. 그 후 1980년 10월, 헌법 전문을 개정한 제8차 개헌이 있었고, 제5공화국이 탄생합니다. 대통령은 간선제로, 임기 7년의 단임제였습니다.

제5공화국 정권은 통치기간 내내 장영자사건이라거나, 여러가지 부정비리사건에 시달립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이 시기 대표적 야당인사 중 하나로, 가택연금을 당하는 등의 방해를 받았습니다. 1985년 2월 12일 제 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대중, 김영삼등 당시 민주화세력이 창당한 신한민주당(신민당)이  들표율 2위를 하면서 집권여당인 민주정의당(민정당)을 바짝 추격합니다. 이를 우리 국민들의 <선거혁명>이라고도 하지요. 그만큼 전두환정권이 국민들의 지지를 잃었다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이후 86년에는 직선제 개한을 위한 서명운동이 시작되기도 하는 등, 본격적인 직선제 개헌 투쟁이 벌어집니다. 당시 시위대의 구호는 '파쇼헌법철회' '군부독재타도' 였다고 하는데요, 줄여서 '파헌철''군독타'를 외치기도 했답니다. 이쯤되면 80년대 학번 선배님들께서 정말 자세한 경험담을 풀어주실 수 있을텐데요, 제보 부탁드립니다. ^^

이 과정에서 86년 위장취업하여 노동운동을 하던 대학생에게 성고문을 한 '부천서 성고문사건'과 87년 1월, 대학생 박종철의 고문으로 인한 사망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전두환은, 88올림픽등의 성공적인 개최등을 이유로, 4.13호헌조치를 단행합니다. 하지만 국민들은 또 저항했습니다. 종교계와 재야단체에서 호헌철폐를 반대하는 성명이 이어지고,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에서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조작, 축소되었다는 발표를 합니다. 결국 전국적인 시위가 이어지게 됩니다.

87년 6월 10일 <박종철군 고문살인 조작,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개최되었습니다. 전국 18개 도시에서 일어난 이 시위에는 많은 시민들이 호응을 하셨다고 하지요? 서울시청앞을 가득 메운 흑백사진은 지금 봐도 감동적입니다. 하지만, 6월 9일, 연세대학교 교내 시위도중 경찰의 직격최루탄을 맞고 대학생 이한열이 쓰러져 사경을 헤매게 되었습니다. 최루탄발사 규탄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시위가 과격해지기도 합니다. 6월말까지 이 시위가 계속되었고, 결국 전두환과 노태우는 6.29선언을 발표합니다. 그리고 87년 10월, 국민투표를 통해 대통령 직선제 5년 단임의 내용을 골자로한 제9차 개헌이 이루어집니다. 이후 제6공화국이 출범하고요. 직선제 개헌을 얻어 낸 것이죠.  하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을까요?

그렇게 이루어 낸 87년의 헌법과 제6공화국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87년 이후의 이야기들은 여기서는 하지 않겠습니다. 1948년 제헌헌법 이후, 전진과 후퇴를 되풀이하며 이어진 헌법의 역사입니다. 어떻게 보면 답답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젊음을 바치고, 희생하고, 목숨까지 잃었는데, 지금 우리 민주주의는 너무 허약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하지만 프랑스대혁명도, 100년에 걸쳐서 이루어진 역사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있습니다. 어쩌면, 2013년의 대한민국도, 무언가를 향해 가는 과정일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민주주의일지 어떨지는, 지금의 우리에게 달려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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